* 창작 스터디 1주차 주제 -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케이크 준비해가세요~ 크리스마스 한정 케이크! 만 오천원 이상 구매하시면 재키 인형도 드려요!"
크리스마스. 연인.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 단어들을 무한반복 하며 외친지도 벌써 3일째. 이제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외치는 이 오글거리는 멘트도 익숙해졌고, 짧은 치마 덕분에 추위에 얼어터져 감각이 없는 다리에도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할 일도 없겠다, 용돈이나 벌자며 시작한 5일간의 단기 아르바이트. 아직 크리스마스까지 이틀의 시간이 남아서인지 케이크를 사는 손님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원래 이런 프렌차이즈 빵집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크리스마스 이브나 당일, 케이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팔고 있는 거니까. 특히나 베이커리도 아니고 이런 도넛 전문점의 케이크는 정말 어지간히 급하지 않고서야 잘 사지 않는다. 그나마 이번 사은 이벤트로 얹어주는 곰 인형이 대박을 치는 바람에 손님이 좀 있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첫날엔 처음 하는 일이라 긴장해서, 두 번째 날엔 추위에 떠느라 보이지 않던 거리의 모습도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인데도, 크리스마스 시즌의 거리는 4계절 중 가장 따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온 거리를 노랗게 밝히는 전구들. 사람들의 목에 휘감겨 있는 털목도리. 따뜻한 토피넛 라떼. 온갖 색의 전구로 휘감겨 있는 높은 크리스마스 트리. 유독 착 달라붙어 서로의 온기를 느끼려는 연인들… 저 연인들을 보는 건 거슬리지만 길 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지루한 아르바이트의 활력소가 된다. 특히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거리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저마다 다른 멘트를 외치며 손님을 끌어 모으고 있다. 연인을 위한 케이크를 준비하라는 나부터 여자친구를 위해 시즌 한정 립스틱을 선물하라는 화장품 로드샵 알바, 크리스마스 커플 세트가 할인 행사 중이라는 레스토랑 알바, 따뜻한 기부를 실천하라며 종을 울리는 구세군까지…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사자다. 길 건너편 M도넛의 마스코트인 저 사자! 멍청한 표정에 다른 인형 탈보다 배는 커 보이는 머리를 뒤집어쓰고 온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인형 탈 알바. 내가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보였으니, 지금은 꽤 유명인사다. 요즘은 인형 탈을 쓰고 가게를 홍보하는 곳이 꽤 늘긴 했지만 이 거리의 독보적인 스타는 바로 저 사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스코트 자체가 워낙 독특한데다 리액션이 커서 저 사자의 멍청함이(사람들은 귀엽다고 표현하는 것 같지만)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드는가 하면, 벤치에 '생각하는 사람' 자세로 앉아 명상에 잠겨있기도 하고, 급기야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날엔 경쟁사인 우리 가게에 저 큰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려다 자동문에 끼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나와 매니저님이 바로 꺼내준 덕에 금방 빠지기도 했고, 바둥대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과 매니저님이 빵 터져버려서 즐거운 에피소드가 되기는 했지만, 덕분에 아르바이트 첫 날이라 긴장한 내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다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연인들을 위한 케이크 어쩌구를 외친지 두어 시간쯤 후에 사자가 거리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이 꽤나 입 소문을 탔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사자에게 몰려간다. 귀엽다고 꺅꺅대며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는 여자들과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찍어주는 애인. 인형 탈 알바면 분명 남자일 텐데… 저 남자는 알까? 지금 자신은 여자친구가 생판 모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웃는 모습을 찍어주고 있는 것이란 사실을… 저 인형 탈의 위력은 대단해서,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관계없이 인형 탈의 귀여운 이미지만 남게 된다. 저 탈 안에는 속이 시커먼 사람이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양의 탈을 쓴 늑대! 그리고 그것에 속아넘어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
그러고 보면 저 사자탈을 쓴 알바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어떤 사람일까? 저 탈처럼 귀여울까? 훈남? 아니. 반전으로 지적으로 생겼을 수도. 그렇게 생각하면 멍청한 사자 얼굴과 매치가 안돼서 위화감에 웃음부터 난다. 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알바중이면 솔로겠지. 아니면 여자친구 선물을 살 돈을 모으나? 그럴 수도 있다. 보통 단기알바로 돈 모아서 크리스마스는 연인과 근사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짜증난다. 저런 멍청해 보이는 사자에게도 밤이면 수고했다고 카톡이라도 넣어 줄 암사자가 있는데. 아니야. 어쩌면 엄청 못생겼을지도 몰라.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사자를 바라보니 사자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피했다. 뭐야 내가 보고 있던걸 들킨 건가? 눈치만 빨라가지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내심 저 사자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저 알바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행복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나에게는…
"어이, 이 케이크 하나 얼마야? 하나 줘봐."
...이딴 싸가지 없는 불청객뿐인데.
퇴근 시간. 미들 타임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마감타임과 교대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집으로 향한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춥지만, 추위를 느끼지 않게 하려는 듯 따뜻한 분위기. 어쩐지 이런 날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 보내는 것은 아니다 싶다. 나도 한 번 분위기를 내볼까? 고민 끝에 근처 팬시점에 들러 예쁜 크리스마스 팝업카드를 샀다. 펼치면 눈 내리는 하얀 성이 튀어나오는 멋진 카드에 무슨 내용을 쓸지 생각하니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불 꺼진 차가운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To. 옆에 쓸 이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크리스마스 이브.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유독 손님이 많다. 날도 날이지만, 이 사람들의 목적은 케이크보다는 케이크와 함께 살 수 있는 곰 인형인 듯하다. 플라잉 재키! 아르바이트생들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귀여운 곰 인형. 나 역시도 갖고 싶지만 혼자 사는 내가 만 오천원어치의 케이크나 도넛을 먹는 것은 무리여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 그래도 하나쯤은 매니저님한테 부탁하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정 안되면 아르바이트비로 큰 맘 먹고 대량의 도넛을 사리라 마음먹고 있다. 매일 도넛만 먹게 되겠지만,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 셈 치고..
그러나 재키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거의 한 몸이 될 기세로 들러붙은 채 케이크를 사러 온 연인들의 손에는 저마다 곧 그 손을 벗어나 날아가려는 듯한 모습의 곰 인형이 들려있었다. 애인이 없다는 것은 평소엔 전혀 불편할 것이 없다가도 이럴 때에는 한없이 부러워지는구나. 이제 남은 곰 인형은 다 하나. 제발 아무도 안 사갔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건만, 야속하게도 뿔테 안경을 쓴 손님이 케이크를 사기 위해 찾아왔다. 급히 달려온 듯 숨을 몰아 쉬는 남자. 오호라.. 어쩐지 지적인 이미지에 순하게 생긴 것이 내 취향.
"아, 저기…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보러 왔는데요. 어떤 게 제일 잘 나가는지.."
"여기 이게 제일 잘 나가요. 맛도 이 중에선 제일 괜찮고, 딱 만 오천원이라 플라잉재키도 받아가실 수 있겠네요."
"아… 저 곰 인형… 좋아하나요? 저런 거."
목적이 재키가 아니었나! 괜히 말했다. 딱 하나 남은 건데… 그래도 재키 증정 이벤트를 안내하는 것은 알바생의 의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간혹 이벤트를 몰라서 챙기지 않은 손님이 다시 찾아와 따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럼요! 알바들도 다 노리고 있다고요. 지금 딱 하나 남았어요."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럼 이걸로 주세요." 하고는 돈을 건넨다. 이렇게 하나 남은 재키도 이별을 고하는구나.
"아, 그런데 저기… 혹시 카드도 함께 파나요? 사러 갈 시간이 없어서…"
"여자친구 주시게요?"
"아니 뭐…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수줍은 듯 코를 매만지며 고개를 숙인다. 대박. 고백하나 봐. 귀엽네. 카드는 함께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러고보니 어제 샀던 팝업카드가 있을텐데. 그래. 난 쓸 사람도 없고, 기부하는 셈 치지 뭐.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실래요? 저한테 남는 게 하나 있어서."
"네? 아니..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가져가세요. 어차피 쓸 곳도 없고, 방치하는 것보단 누가 쓰는 게 낫죠."
연신 감사하다고 웃으며 카드를 받는 그에게 꼭 성공하시라며 파이팅을 외쳐줬더니 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꽤 귀엽다. 아… 여자는 좋겠다. 크리스마스에 고백이라니. 그것도 저런 귀여운 남자한테.
그렇게 하나 남은 재키마저 떠나가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마지막 재키가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멍청한 사자가 또 다시 거리를 휘젓고 다녔는데도, 무슨 짓을 하고 다니나 구경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가끔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게 누구인지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퇴근할 즈음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려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터덜터덜 집에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제 내일이면 이 고생도 끝난다. 내일도 이렇게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면 나의 크리스마스는 마치 오지도 않은 것처럼 지나가겠지. 결국 재키는 손에 넣지 못했다. 그 남자는 고백에 성공했을까? 4일간 케이크를 그렇게 많이 팔았는데, 정작 나를 위한 케이크는 없구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손님으로 넘칠 것이라 각오하고 온 것이 무색하게 케이크를 사러 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전날 미리 사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재키가 다 떨어졌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서였는지. 오히려 정신 없는 쪽은 사자인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이, 제 아무리 리액션이 신의 경지에 다다른 인형 탈 알바라 할지라도 버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편하기만 한 일은 아닌 것도 같은 게… 처음으로 사자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지. 그래도 너는 최소한 춥지는 않잖아..
"수고하세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남들을 위한 케이크를 파느라 정신 없던 나의 아르바이트도 이렇게 끝이 났다. 날도 날이고, 남은 케이크도 많아서 하나쯤은 손에 쥐어줄 법도 한데, 그마저도 마감 알바의 몫. 미들인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그래도 집에 틀어박혀 벌써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캐빈과 시간을 때우느니 돈이라도 버는 게 낫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집에 가면 할 것도 없는데 조금 걷다가 들어가볼까… 하고 멍하게 걷는데, 뭔가 거대한 것에 부딪쳤다. 멍청이 사자다.
"아, 죄송합니다."
대충 사과하고 다시 길을 가려는데 이 사자 상태가 어쩐지 이상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뭔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화장실이 급하면 매장으로 돌아가던가… 한 번 흘겨보고 등을 돌린 순간, 뭔가가 손을 강하게 낚아 채 그대로 달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끌려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 사자야!! 드디어 미친 걸까? 진짜 음흉이 아냐??
날 그대로 끌고 가던 멍청이 사자는 거리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트리 앞 벤치에 날 앉히더니, 그대로 옆의 테이크아웃 카페로 달려갔다. 추위에 드디어 미친 걸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그 사자가 하는 꼴을 보고 있었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일어나서 도망가야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하얀 상자와 인형을 들고… 인형? 가만히 보니 이 인형, 재키다. 플라잉 재키. 그리고 하얀 박스도 방금 전까지 내가 팔던 케이크 상자. 왜 M사 마스코트가 D사의 케이크를 들고 있는 건지.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나에게 사자는 케이크 상자를 다소 수줍은 몸짓으로 건네왔다.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상자 위에 붙어있는,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갖고 있었던 팝업카드를.
"어… 어제 사가지 않았어요? 그 뭐냐, 고백한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멍청이 사자는 내 손에 재키와 케이크를 쥐어주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카드를 펼쳤다. 눈 내리는 하얀 성. 그리고 그 아래의 깔끔한 글씨.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 날인 5일 전쯤에 본 이후로 마음에 들어 일부러 근처에서 얼쩡거렸는데, 크리스마스에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준비했다는 내용의.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을 꼼지락거린 채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바보 같기는. 그럼 케이크 사던 날 번호라도 적어서 주던가. 사자가 나에게 작은 곰 인형을 건네는 꼴이, 마치 방금 사냥한 동물이라도 주는 마냥 우스꽝스러워서 그대로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다.
나를 위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그렇게 내가 갖고 싶던 재키와 함께 날아와 내 손 위에 앉았다. 처음, 진심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않길 잘했다고 한 순간 생각했던 것 같다.
사자의 정체는 그 멍청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지적인 느낌을 풍기는 남자. 진짜 안 어울린다. 아니, 다시 보니 사자의 얼굴이 이제야 귀여워 보이는 것이, 의외로 수줍음 많은 저 성격과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나의 얼어터진 손과 다리의 감각이 없는 것은, 오랜 시간 추위에 떨었기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온기 덕분인지 지금은 가늠하기 어렵다.